써멀 구리스 고르는 법: 사용 환경별 선택 매트릭스

쿨러를 열어 보면 회색 페이스트가 가장자리부터 갈라져 있는 경우가 있다. 바른 지 3년이 넘었는데 한 번도 다시 열어보지 않은 흔적. 온도가 슬금슬금 오르는 걸 그래픽카드 탓, 방 온도 탓으로 돌리다가 뒤늦게야 진짜 원인을 찾는 경우, 얼마나 흔할까?
써멀 인터페이스(Thermal Interface Material, TIM)는 CPU나 GPU와 쿨러 사이의 미세한 틈을 메우는 물질이다. 금속 표면은 눈에 안 보일 만큼 울퉁불퉁하고, 그 틈에 낀 공기층이 열 이동을 막는다. TIM은 그 공기층을 걷어내는 물질일 뿐이다. 문제는 "1도라도 더 낮은 제품"을 찾는 순위표가 인터넷에 넘쳐난다는 것. 정작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느 제품이 1등이냐가 아니라, 내 사용 환경에서 뭘 피해야 하느냐 쪽이다.
일반 데스크탑, 노트북·GPU·콘솔, 딜리드(delid, 히트스프레더 제거 작업)·다이렉트다이(direct-die, 뚜껑 없이 쿨러가 다이에 바로 닿는 방식), 테스트벤치. 이 네 환경은 위험도와 유지 주기가 완전히 다르다. 같은 제품이 한쪽에서는 최선, 다른 쪽에서는 최악일 수 있다는 뜻.
실패했을 때 되돌릴 수 있는 비용도 환경마다 다르다. 일반 데스크탑에서 도포량을 잘못 잡으면 다시 닦고 새로 바르면 그만. 딜리드한 다이 위에서 같은 실수를 하면 보드 전체를 버릴 수도 있다. 순위표는 이 차이를 반영하지 않는다. 표에 적힌 숫자 하나만 보고 고르면 내 상황에서는 과한 제품을 사거나 반대로 부족한 제품을 사는 일이 똑같이 벌어진다.
순위표 자체는 왜 계속 흔들릴까? 벤치마크 매체마다 시험용 CPU, 쿨러, 실내 온도, 측정 소프트웨어가 다르니 같은 제품이라도 매체별로 순위가 뒤집힌다. 신제품이 나오면 예전 1위는 며칠 만에 순위 밖으로. 그 흐름을 매번 쫓아다니는 대신, 아예 흔들리지 않는 기준을 먼저 세워 두면 어떤 제품이 새로 나와도 판단이 빨라진다. 기준은 순위표가 아니라 사용 환경에서 나온다.
일반 데스크탑, 실패 확률부터 낮춘다
사무용이든 게이밍용이든 히트스프레더(Integrated Heat Spreader, IHS, CPU 다이를 덮은 금속 뚜껑)가 있는 일반 데스크탑이라면 기준은 단순하다. 실수해도 복구가 쉬운 쪽을 고른다. 정답은 전기 비전도성 페이스트. 흘러도 합선 걱정이 없고 도포량이 살짝 많거나 적어도 성능 손실이 치명적이지 않다.
액체금속(liquid metal, 갈륨 합금 기반 페이스트)은 방열 성능만 보면 매력적인데 전도율 수치가 일반 페이스트보다 확실히 높게 나온다. 다만 히트스프레더나 쿨러 베이스가 알루미늄이면 갈륨과 만나 시간이 지나며 접촉면이 부식으로 상한다. 전기도 통해서 한 방울만 옆으로 흘러도 메인보드 주변 부품을 태울 수 있다. 처음 시도하는 작업치고는 위험 대비 얻는 게 너무 작다는 계산. 전도성 그래핀 시트도 같은 이유로 초보자는 피하는 편이 낫다.
도포성, 청소 편의, 가격, 검증 기간. 이 네 가지를 함께 본다.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바르기 어렵거나 나중에 지우기 힘들면 다음 재도포를 자꾸 미루게 된다. 재도포를 미루면 결국 갈라지고 말라붙은 페이스트를 그대로 쓰는 상황으로 되돌아간다.
도포 도구는 튜브에서 바로 짜서 카드나 헤라로 얇게 펴 바르는 방식이 초보자에게는 가장 실수가 적다. 중앙에 콩알만큼 짜고 쿨러 압력으로 자연스럽게 퍼지게 두는 방식도 있지만, 압력이 고르지 않으면 한쪽 모서리가 비어버리기 쉽다. 재도포 주기는 보통 1~2년이 기준이지만, CPU 온도가 평소보다 눈에 띄게 올라갔다면 주기와 상관없이 열어본다.
노트북·GPU·콘솔, 펌프아웃이 진짜 변수다
노트북이나 콘솔은 한번 조립하면 몇 년을 그대로 쓰다 보니, 뜯어서 재도포하는 일 자체가 부담이라 처음 바를 때부터 장기 안정성을 우선한다는 점이 다르다.
여기서 신경 써야 하는 건 펌프아웃(pump-out)인데 열이 오르고 내리길 반복하면 부품이 미세하게 팽창하고 수축하고 그때마다 페이스트가 가장자리로 조금씩 밀려난다. 밀려난 자리에 생기는 게 바로 새 공기층. 온도는 몇 달에 걸쳐 서서히 올라가고 사용자는 그저 "쿨러가 낡았나" 정도로만 느낀다. 진짜 원인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 잘 맞는 건 상변화 TIM 패드 계열. 열을 받으면 부드러워지고 식으면 다시 굳는 방식이라 반복 열사이클에도 밀려나는 정도가 페이스트보다 덜하다. 일반 페이스트는 장기 고온에서 마르거나 굳어버리기 쉬워서 피하는 편이 낫다. 좁은 공간에서 열이 오래 쌓이는 노트북일수록 이 차이가 누적된다.
기준은 순간 최저 온도 몇 도가 아니라 1~2년 뒤에도 그 온도를 유지하는지에 있다. 벤치마크 캡처 한 장에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부분이다.
GPU도 같은 논리를 따르지만 부위별로는 갈린다. 코어 위에는 상변화 패드나 페이스트를 쓰고 메모리와 전원부(VRM) 위에는 별도의 방열 패드를 쓰는 구성이 흔하다. 이 두 부위를 같은 제품으로 통일하면 두께가 안 맞아 접촉이 오히려 나빠지는 경우가 있다. 콘솔은 아예 분해 자체가 어려운 밀폐 구조가 많아서 재도포보다 처음부터 장기 안정성이 검증된 제품을 골라 두는 쪽이 현실적인 선택.
보증 기간도 같이 따져 둘 필요가 있는데 노트북이나 콘솔을 열면 보증이 끝나는 제조사가 적지 않다. 다만 보증이 살아 있는 기기라면 재도포 전에 그 조건부터 확인해야 한다. 온도 문제가 정말 TIM 열화 때문인지, 팬 먼지나 배기구 막힘 같은 다른 원인인지도 먼저 가려낸다. 분해는 한번 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작업. 원인을 좁혀 두고 나서 여는 편이 시행착오를 줄인다.
딜리드·다이렉트다이, 성능보다 통제가 먼저다
히트스프레더를 벗기고 쿨러를 다이에 바로 붙이는 딜리드·다이렉트다이 작업은 난이도가 완전히 다르다. 다이와 쿨러 사이 틈이 훨씬 얇아지는 만큼 성능 차이가 체감될 여지도 커져서 여기서는 액체금속이나 고성능 전도성 시트까지 선택지로 들어온다.
대신 통제해야 할 위험이 늘어나는데 절연 문제가 첫째다. 다이 주변에 촘촘히 박힌 표면실장부품(SMD)은 액체금속과 만나면 한 방울만 흘러도 곧바로 합선으로 이어진다. 작업 전에 그 부품들을 절연 처리하는 손이 한 번 더 든다. 알루미늄 부식도 여전한 변수. 쿨러 베이스나 주변 금속이 알루미늄이면 코팅이나 다른 소재로 바꾸는 걸 같이 고려한다. 제거 난이도도 무시하기 어렵다. 나중에 다시 뜯을 때 굳은 액체금속을 완전히 닦아내지 못하면 잔여물이 남는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따로 있는데 처음 해보는 사람이 시도할 작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딜리드 자체가 보증을 무효로 만들고 다이를 깨뜨릴 위험을 안고 시작하는 작업. 여기에 절연 실수까지 겹치면 복구 불가능한 손상으로 이어진다. 손이 익고 순서를 여러 번 확인한 뒤에야 시도할 영역이다.
왜 이런 위험을 감수할까. 오버클럭이나 극한 벤치마크에서는 히트스프레더 자체가 열 저항을 하나 더 만드는 층이다. 이 층을 없애고 다이에 직접 닿게 하면 온도 여유가 생기고, 그 여유만큼 클럭이나 전압을 더 밀어붙일 수 있다. 다만 이 이득은 오버클럭을 실제로 하는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다. 기본 클럭으로 쓰는 일반 사용자가 딜리드까지 갈 이유는 없다. 제거 작업에는 접착제를 녹이는 열이나 면도날 같은 도구가 들어가는 경우도 많은 만큼 장비와 절차를 미리 정확히 알아본 뒤에 시작한다.
테스트벤치, 반복 탈착의 비용을 계산한다
여러 대를 조립하거나 부품을 자주 바꿔 끼우는 테스트벤치는 앞의 세 환경과 기준이 또 다른데 여기서 중요한 건 최고 성능이 아니라 g당 가격과 청소 편의다.
탈착이 잦으면 그만큼 페이스트를 자주 새로 바르고 닦아낸다. 비싼 극한 성능 제품을 매번 소모품처럼 쓰면 계산이 맞지 않는다. 청소가 오래 걸리는 제품도 마찬가지. 조립과 해체를 반복하는 작업에서 페이스트 지우는 데 시간을 쏟으면 정작 봐야 할 벤치마크 시간이 줄어든다.
이 환경에서는 일반 비전도성 페이스트 중에서도 굳기 전에 넉넉한 시간을 주는 제품, 통에 담겨 대용량으로 파는 제품을 우선한다. 성능 1~2도 차이보다 며칠 안에 몇 번을 다시 바를 수 있느냐가 실제 작업 속도를 더 크게 좌우한다.
재현성도 걸려 있는데 벤치마크를 여러 부품 조합으로 반복 측정할 때는 같은 조건을 유지해야 결과를 비교할 수 있다. 도포 방식이나 제품이 회차마다 바뀌면 온도 차이가 부품 때문인지 페이스트 때문인지 구분이 안 된다. 그래서 테스트벤치 운영자는 흔히 한 가지 페이스트를 정해 두고 전체 측정 기간 동안 고정해서 쓴다. 이소프로필알코올과 부드러운 천으로 남은 페이스트를 지우는 세척 과정까지 포함하면 결국 총 소요 시간을 줄여주는 제품, 그게 이 환경에서는 가장 좋은 제품.
환경이 바뀌어도 쓰는 재사용 체크리스트
네 환경 모두에 공통으로 적용할 확인 항목이 있다. 제품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이 체크는 그대로 쓸 수 있다.
- 표기 열전도율만 보지 않는다. 포장에 적힌 W/m·K 숫자는 실험실 조건에서 나온 값이다. 실제 성능은 장착 압력, 본드라인 두께(bond line thickness, TIM이 채우는 틈의 두께), 표면 평탄도에 따라 달라진다. 독립 벤치마크나 실측 리뷰를 함께 본다.
- 성능 1위와 일반 사용자 추천을 분리한다. 액체금속은 표기 성능에서 앞서도 전기전도성과 부식 위험 탓에 쓸 수 있는 사람과 환경이 좁아진다는 게 문제다. 제일 좋은 제품을 찾는 것과 나한테 맞는 제품을 찾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다.
- 전기 전도성이 있으면 절연 문제도 같이 떠안는다고 본다. 전도성 제품을 쓴다는 건 결국 주변 부품 절연을 사용자가 직접 책임진다는 뜻. 절연 작업을 할 여건이 안 되면 처음부터 비전도성 쪽으로 고른다.
- 노트북·GPU 재도포는 펌프아웃 방지를 우선순위에 둔다. 지금 당장의 최저 온도보다 반년이나 1년 뒤에도 그 온도가 유지되는지가 실사용에서는 더 중요하다.
- 가품 가능성을 먼저 걸러낸다. 유통량이 적고 인기가 많은 제품일수록 가품이 섞이기 쉽다. 정품 판매처인지, 포장과 로트 표기가 일치하는지는 구매 전에 확인할 부분.
- 장착 압력을 규정 토크로 맞춘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발라도 나사를 대각선 순서로 고르게, 정해진 토크만큼 조이지 않으면 한쪽이 뜬다. 본드라인 두께를 좌우하는 건 제품보다 장착 압력인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
아래 표는 앞서 설명한 네 환경별로 우선 선택할 제품과 피해야 할 제품을 정리한 것이다.
| 사용 환경 | 우선 선택 | 피할 것 |
|---|---|---|
| 일반 데스크탑 | 전기 비전도성 페이스트 | 액체금속, 전도성 그래핀 시트 |
| 노트북·GPU·콘솔 | 상변화 TIM 패드 | 장기 고온에 마르는 일반 페이스트 |
| 딜리드·다이렉트다이 | 액체금속 또는 고성능 전도성 시트(절연 선처리 필수) | 알루미늄 노출부, 절연 없는 첫 시도 |
| 테스트벤치 | g당 가격·청소 편의가 좋은 일반 페이스트 | 비싼 극한 성능 제품 반복 소모 |
제품 순위가 이렇게 자주 바뀌는 건 가격, 재고, 벤치마크 갱신, 가품 유통 탓이 크다. 여기서 정리한 것은 특정 제품의 순번이 아니라 그 순번을 볼 때 적용할 사용 환경 기준이라는 점이다. 구매 직전에는 최신 가격과 독립 벤치마크, 정품 유통 여부를 한 번 더 확인한다.
지금 쓰고 있는 페이스트, 언제 발랐는지 기억나는가? 기억나지 않는다면 다음 재도포 때는 위 네 줄 중 자기 환경에 맞는 줄부터 짚어본다. 일반 사용자라면 그 정도로 충분하다. 매번 최신 순위표를 확인하기보다 환경이 바뀔 때만 생활 관리 기준을 다시 점검하는 쪽이 손이 덜 간다.
그러니 페이스트를 다시 바르기 전에, 지금 쓰는 게 언제 발린 건지부터 확인해 보면 된다. 같은 페이스트라도 장착 압력과 접촉면 상태에 따라 온도 차이가 꽤 벌어진다. 그래서 다음 재도포 때는 도포 전후 온도를 직접 재서 기록해 둘 생각. 표기 수치보다 내 케이스, 내 쿨러에서 나온 숫자가 훨씬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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